불교 지화의 의의
‘불교 지화’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지화(紙花)란 종이 ‘지’ 꽃 ‘화’자로, 꽃이 귀했던 시대 선조들의 지혜로 만들어낸 종이꽃입니다. 한지에 고운 염색을 해서 만들어낸 종이꽃은 많은 정성과 노력으로 빚어지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입니다.
지화가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는 ‘불교 장엄’, 즉 부처님께 꽃을 만들어 올리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불교 지화’ ‘불교 장엄’ 이라고 표현되며, ‘아름답게 장식하다’, ‘화려하고 엄숙하게 장엄하는 것’이란 의미로 부처님 전에 정성과 지극한 마음을 담아 아름다운 것(꽃)으로 장엄하는 일을 말합니다.
지화를 만들어 장엄하는 것은 부처에 귀의하는 수행으로, 당시 생화가 귀했던 우리 불교만이 갖는 고유한 전통 문화유산입니다
지화의 역사를 이야기해 볼까요?
불교에서는 ‘화만’이라 하여 불전을 꾸미고 불타를 공양하기 위해 불전의 난간 등에 조화를 만들어 달아 늘어뜨리며, 꽃을 병에 꽂아 불전을 아름답게 장식하였습니다.
신라와 고려시대 불교의 전성기로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집에 불당을 차려놓고 작은 병에 지화를 꽂아 두었는데, 불가에서 성행한 꽃꽂이가 민가로 이어져 전통문화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석가 탄생에 향을 불상에 뿌리는 관불회라는 의식이 있었으며, 이때 지화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꽃으로 화어당(花御堂)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수반에는 석가의 동상을 모셨지요. 화어당을 본받아 고려의 귀인들은 방안에 작은 당(堂)을 마련하여 석가상을 안치하고 병에 지화를 꽂아 장엄미를 나타내고 믿음의 무아경 속에 삶을 영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교에서 시작된 지화가 민가에서도 생활화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829년(순조 29), 세자가 생각해 낸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이라는 춤에 모란화준(牡丹花樽)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전목단은 8명의 무인이 꽃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4명은 모란꽃 한가지씩을 손에 들고 모란꽃을 한아름 꽂은 꽃병의 주위를 빙빙 돌며 주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수파련(水波蓮)이라 하여 음식 위에 지화를 꽂는 풍습으로, 큰 잔치 행사에 연꽃 3송이를 한 가지에 달리도록 만들어 음식 위에 꽂아 만드는 상차림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종이꽃은 궁중의 의식, 사대부 집안의 잔치, 서민에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이처럼 종이꽃을 많이 사용하는 것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화는 생화보다 공을 들여 웅장하게 원색을 사용하여 만듦으로써 신비감을 자아내 신성시되었고, 규격화된 의식에 여러 종류의 다양한 색채의 꽃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만들어 장식할 수 있는 것은 종이꽃뿐이었으며, 크고 작은 뜻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화에 대한 기록이 많은 고서에 전해져오며, 사찰의 법당 영단에 있는 감로탱화에 그려진 지화 장엄은 민간에서나 국가에서 행한 의례의 일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귀한 종이꽃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匠人)을 지화장(紙花匠)이라 불렀습니다.
1580년 조선시대 감로탱화
감로탱화의 중앙재단 모습
지화를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생화가 없거나 꽃이 쉽게 시들어 버리는 계절에 일상에서의 장식이나 의식에 바치는 가화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어떤 의식에든 규모와 성격에 맞는 꽃을 크기나 다양한 색깔과 종류로 장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꽃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의미로 의식에 바쳐진 가화들은 의식이 끝난 뒤 태워지게 되는데, 생화보다 완전하게 타버리고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현상으로부터 인간의 염원이 하늘에 전달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넷째, 불교의례에서 생화를 꺾어 공양하지 않고 꽃을 만들어 올리는 것은 불교의 계율을 따르는 방편의 하나이기도 합니다.